법적으로 어른의 나이가 되고나서도 아, 나 이제 으른!이라고 느껴진 적이 별로 없었다.

대학 때 시험을 끝마치고 (아마도 망치고) 해가 진 캠퍼스에서 맥주를 몰래 홀짝이던 때에는 아, 나 이제 대학생이구나? 라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졸업하고 통장에 매달 들어오는 돈이 생겨도, 운전을 시작해도 그냥 새로운 루틴이 생긴 것이었을 뿐 좀처럼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와 내가 생각하는 어른 사이에 까맣고 두꺼운 줄이 그어져 있는 것 같이. 벽까지는 아니라 아마도 슥 넘어갈 수는 있는데, 내 의지로 안넘는 것인지 못 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를 바닥에 깔린 선처럼?

그러다가 올해 여름 부모님이 나를 방문하고, 말이 안통하는 나라에 오셨으니 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때,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보다 무리없이 척척 계획한 일정으로 이끌 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 나도 이제 어른인가?> 부모님을 뒷자석에 모시고 여기서 저기로 라이드도 하고, 두 분을 대기석에 앉혀놓고 렌트카도 가져오고, 국립공원으로 바다로 레스토랑으로 모시고 다니면서 이걸 내가 혼자서도 무리없이 하다니 은근히 신기하며 으쓱했다.
그리고 부모님과 2주라는 시간을 한 공간에서 지내니 당연히(?) 언성이 오가기도 했고 나는 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의무감을 느꼈을 때, 그리고 그걸 실천했을 때도 내가 머리가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글을 쓴 이유는 최근에 또 그런 모먼트가 있었다. 바로 생에 처음 나만의 김장을 했을 때. 김장이랄 것까지 없는 비록 두 포기의 규모였지만, 그래도 김장철에 했으니 김장으로 치자. 김치를 직접 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이미 사와버린 수육용 돼지고기였다. 찬 공기가 감도는 이 날씨에 몇년 째 못먹고 있는 김장김치 속과 함께 먹고 싶은 충동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비록 시작부터 끝까지 안걸던 영상통화까지 걸어가며 엄마한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인생에 김장이라고는 엄마가 할 때 충실한 조수의 역할을 했던 것 뿐이었는데, 이걸 내가 주관하다니 나 이제 누가봐도 어른이잖아? 김치 속의 간을 볼 때는 엄마와 같이 살때 간보던 실력으로 그 쨍하고 강렬한 맛을 기억하면서 맛을 맞추어 갔다. 그리고 심지어 꽤나 맛있게 되었다. 엄마의 김치 맛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어쨌든 이것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비로소, 드디어 어른이다. 한참 늦은것 같지만, 그래도 어른이 된다는 것은 꽤나 멋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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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이번 여름의 가장 큰 이벤트는 엄마 아빠의 방문이었다. 방문 전까지만 해도 장빗빛으로 기대하고 들떠있었는데 현실이 닥치고 뒤돌아보니 내가 얼마나 단순하고 나이브했었던지 비웃게 되었다. 간만에 느껴보는 커다란 감정들의 소용돌이었다. 우리는 너무 떨어져 살았던걸까. 더욱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2주 간의 방문 후 멘탈 후유증들로 괴로웠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니 또 점점 흐릿해져간다.

- 오랜만에 이 작은 동네에 유일한 (마을 회관 느낌의) 재즈 클럽에, 시애틀 살 때 듣기 시작한 Delvon Lamarr Organ Trio가 공연을 하러 온다고 해서 보러갔었다. 역시나 직접 들으니 음악이 다가오는 울림의 깊이가 달라서 새삼 놀랐고 너무 좋았다 (재미까지 있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Girly face 라는 곡이었다. 연주에 앞서 "우리 딸이.. 십대 때 학교에 괴롭히는 애들 때문에 힘들어 할 때 만든 노래인데, 내가 우리 딸을 girly face라고 부르거든.. 그래서 제목이 그거야" 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고 곡을 시작했다. 아빠가 속상해 하는 딸을 위로하는 마음이 너무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아빠와 이런 교감은 못할 것 같아서 서글퍼졌다.

- 얼마전 탄자니아 마사이족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10년도 더 전에 봉사활동을 가서 고작 3주 지내다 왔지만 탄자니아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내 20대 아끼는 추억 중 하나다. 무엇에 대한 얘기였냐면, 중동의 거대 오일 머니 자본이 탄자니아 정부와 손잡고 마사이족들을 그들의 생활 터전인 세렝게티나 응고로고로 국립공원에서 쫓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고 악랄하게. 자연 보호를 명목으로 땅의 주인들을 빈털터리로 만들고 쫓아내고 나면, 중동 부자들이 와서 야생 동물을 사냥하도록 하게 해주는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끓어 올라 뭔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찾아봐도 나같은 개인은 결국 할 수 있는게 없는 것 같았다. 큰 무기력을 느꼈다. 부디 잘 살아남으시길 마음 속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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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동네에 오고 친한 이웃이 하나둘 생겼다
가장 친한 이웃 중 하나는 미셸네
미셸네 부부는 남편과 같은 직장인데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투싼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으로 저녁에 맥주 한잔 하기로 한 날
우리 또래인 미셸은 아들을 집에 두고왔다고 했다
아 그럼 시터랑 같이 있니? 라고 물었더니
아니 혼자 있는걸 좋아해… 10대거든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틴에이져?
그냥 갓 십대가 된 아이도 아니고 무려 16세 아들이 있다고?

나중에 만나게 된 미셸네 아들은 정말 캐릭터있는 친구였다
거대한 아프로 머리 속에 아기아기한 얼굴이 숨겨져있는 아이
우리들의 대화에 마치 어른마냥 잘 들어주고 자기 얘기도 곧 잘 하는
유머감각도 좋아서 농담을 주고 받다가
아니 얘 그냥 어른 아냐? 싶다가도
미셸이 얘 여자애랑 잘해보려고 무슨짓까지 했는줄 알아? 라고 하면
엄마! 하면서 손으로 자기 엄마 입을 틀어막아버리는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미셸은 아들 애기때 정말 고생 많이했다고
아기물티슈 살 돈이 없어서 맥도날드 냅킨으로 아들을 닦아줬다고 이제는 웃으며 말하지만
지금의 그들을 보며 나는
애가 십대면 저렇게 재밌을 수 있단말야?
애가 십대인데 엄마가 젊고 쿨할 수 있단말야?
나도 20살때 애를 낳아버릴걸 그랬어? (너무 멀리감)
등등의 편리한 생각을 한다

아무튼 이 아들내미에게는 근사한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재즈 기타이다.
취미라기엔 꽤 심각해서 레슨도 받고, 학교 클럽에서 합주도 하고, 가끔씩 연주회도 참가한다
그렇기에 이 가족의 취미는 자연스럽게 재즈가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를 한 재즈 기타리스트 공연에 초대해주었다.

이 작은 도시에도 있을 건 나름 다 있어서 재즈클럽이 있다
처음가본 우리동네 재즈클럽은 뉴욕처럼 삐까뻔쩍하고 관객들이 한껏 차려입고 오는 분위기가 아니라
마을 회관 사이즈 정도에 음식과 술을 부담없는 가격에 팔고 있었다
전혀 잰 체하지않고 소탈한 분위기의 공연장이었다

오늘의 연주자는 Pasquale Grasso 였다
재즈에서 흔한 트리오나 쿼텟이 아닌 기타와 연주자만이 공연을 채웠다

연주자는 곡을 시작할 때마다 잠깐 마이크를 들고
이탈리아 억양의 능숙한 영어로 노래에 대한 자기 얘기를 풀어놨다.
첫 곡에 대한 얘기는 자신이 재즈 기타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무려) 여섯살로 돌아가는데
이탈리아의 나폴리보다 더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부터
재즈 연주가의 꿈을 키워왔을 소년이 자라서
눈앞에서 이렇게
낭만적이고
마음을 울리는 연주를 해주다니
아름답다 아름다워 머리속이 꽃밭이 되었다

어떤 노래를 소개하면서는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노래를 틀면
오늘 하루를 잘 마칠 수 있을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온화한 표정으로 연주하는 그 노래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 정말 그럴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주자는 인터미션이 되자
붉은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관객들 사이를 다니며 눈인사를 해주거나 스몰톡을 했다
기타도 잘치면서 친절한 마음까지 가진 거 같아 더 즐거웠다

아무튼
재즈를 좋아하는 소년 덕분에
소년때부터 재즈를 좋아해 온 이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던
꽤나 낭만적이고 재즈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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