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께였나, 주말이 되어 남자친구와 나는 각자의 일을 할 곳을 찾다가 패서디나에 위치한 카페에 가게 되었다. 얼마 후 출출해진 우리는 간단히 점심으로 파니니를 먹기로 하였다. 메뉴는 정했지만 낯선 동네에 있다보니 어디로 갈까 검색을 하다가 '로마 마켓'이라는 작은 이탈리안 슈퍼에 (파니니는 아니지만) 맛있는 이탈리안 샌드위치가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멀찍이 떨어져 아주 겸허한 외관의 교실 하나 남짓한 작은 공간의 상점으로 들어섰다. 빽빽한 가게속에서 이것 저것 구경을 하고 있다가, 내가 사려고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영 구하기 힘들었던 파스타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역시나 여기에도 안보이네, 하며 파스타 코너에서 구경하고있는데, 나만큼이나 작은 키의 할아버지가 옆으로 소리없이 슥 오셨다. 거동이 불편해보이는 할아버지의 한쪽 등은 꽤나 굽어있었다. 뭐를 찾고있냐 불쑥 물으셔서 '아시니 디 페페' 파스타를 찾고있는데요.. / (아주아주 강한 이탈리안 억양으로) 그건 없어 근데 그냥 저기 있는 저런거 써도 돼 / 아 네... 이 대화를 하고 있자니 마치 '소면 있나요?' 라고 하자 '그냥 저기 있는 중면 써 중면도 괜찮아'하는 고향분들과의 대화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꼭 그 파스타를 구하고 싶었어서 잠시 멀뚱이 있자 할아버지는 마치 대충 저기 있는거 집어가면 되는데 싶은 눈빛을 보내고 본인이 있던 햄 코너의 자리로 돌아갔다. 

신기한 이태리제 물건이 많다 싶어 또 찬찬히 구경하다 보니 할아버지가 있는 카운터가 흥미로웠다. 각종 이탈리안 햄으로 가득찬 정육점 쇼케이스 옆에, 각 종 치즈와 햄, 저울과 햄슬라이서를 올려놓은 카운터 뒤 아주 작은 공간에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 그리고 할아버지 바로 앞에는 핑크색 두꺼운 종이로 둘둘 말려진 벽돌만한 것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아! 저게 그 유명한 샌드위치인가보다. 

두꺼운 종이로 둘둘 말려있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보였지만, 부피가 커서 하나 사서 둘이 나눠먹을 생각으로 하나만 집었더니 할아버지가 왜 한개만 집냐 묻는다. 나눠 먹으려고요. 라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그럼 (모자라서) 다시 올텐데." 라고 바로 받아치셨다. 아주 두말할것도 없다는 식으로. 재미있는 어르신이네. 나는 물었다. 이 샌드위치안에 뭐가 들었어요? "내가 이 자리에 70년째 있었는데 말이야. 아무도 그걸 물어본적 없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어디 그런걸 묻냐는 식으로. 70년씩이나 계셨다고요? 놀란 우리는 이 할아버지의 매력에 빠져든다. 가게를 70년 동안 지켜서일까 할아버지는 정말로 놀랄만큼 뽀얀 피부를 가지고 계셨다.

하나를 더 집어야하나. 갈등하는 사이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와서 할아버지한테 "로사리오, 아무개 햄 들어왔어요?" 등등 자신의 할아버지 대하듯 편하고 친숙하게 이것저것 묻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손님들을 붙잡고 우리 둘을 고자질한다. 얘네 둘이 와서 샌드위치 하나 사려고한다고.. 이쯤되니 우리가 너무 쪼다같다. 얼른 하나를 더 집었다. 그러고는 정신차려보니 다른 사람들은 대여섯개씩은 기본으로 집어간다. 이 투박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샌드위치를...

그 사이에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여러명이 프로슈토, 살라미, 낯선 이름의 햄들을 줄지어 사간다. 어떤 거 얼마나 주세요 할 때 마다 로사리오 할아버지가 한 손으로는 무섭고 거대하게 생긴 슬라이서로 햄을 얇게 슥 슥 움직여 다른 한 손으로 핑크색 두꺼운 종이위에 겹친 기름종이에 받아내는데, 주문한 사람들은 마치 줄서서 사탕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얌전히 기다렸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육가공품류를 사가자 우리도 궁금해졌다. 프로슈토에 관심을 보이자 할아버지가 이거 진짜 맛있는 거라며 두 점을 썰어서 먹어보라고 내밀었다. 그랬다. 내가 먹어본 중 제일이었다. 그 맛을 보니 안 살 수가 없어서 그럼 쿼터 파운드만 주시겠어요. 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또 느릿느릿 슬라이서를 움직여 종이에 햄을 한 조각씩 얇게 떨궈준다.

종이에 얼마만큼 햄을 쌓자, 할아버지는 저울에 딱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울에는 정확히 0.25lb가 찍혀있었고, 할아버지는 나의 놀란 동공에 자신감에 찬, 그리고 여전히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마치 '야, 봤냐.'를 말하는 듯이. 나는 이 순간을 아직도 잊지못하고 가끔씩 불쑥 떠오르기까지하는데, 그런 장인과의 조우가 너무 신선하고 자극적인 경험이서일까. 요즘 시대에 장인이란 말이 참 낯선 것 같지만... 장인이란게 이런거구나. 한 자리에서 70년동안 같은 일을 매일 같이 했왔다면 그 경지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걸까. 그러고보니 할아버지의 한 쪽 굽은 등은 같이 햄 슬라이서를 움직이는 동작에 맞추어 굽어있던 것이었다. 강산이 바뀌어도 일곱번은 바뀔 동안 그의 등도 서서히 굽었으리라.  

물건을 잔뜩 안고 가게를 빠져나오니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연것 처럼, 엘에이가 아닌 잠시 다른 세계의 공간에 있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궁금함을 못참고 차안에서 먹기 시작한 로사리오표 샌드위치는 그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내가 먹어본 중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단순한 재료, 최고의 맛.
로사리오의 카운터

+ 돌아오는 길에 검색을 해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동네에서 유명인사였다. 같은 자리에서 손님들과 만나는 것을 너무 좋아하셔서, 새벽같이 눈이 떠져 가게로 오신다고 한다. 이 곳이 궁금하다면: https://goo.gl/maps/rQ6HT7PRBqFD6FHNA 

+ Recent posts